역사이야기

중국의 통일전선 1

이월인생 2022. 6. 15. 18:01

중국

1905년 손문이 공화국을 세운다는 목표 아래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무장봉기를 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동맹회 하부조직을 중심으로 1911년 우창봉기가 일어나 성공하고, 1개월내 14개성에서 봉기가 일어나 독립을 하게 되었다. 혁명파들은 통일된 정부의 필요성을 느껴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청나라는 진압할 능력이 없어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청조 봉건군주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중화민국이 탄생(신해혁명)하고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는 손문이 취임하게 된다.

군대가 없던 손문은 원세개와 공화제를 추진하는 조건으로 원세개와 손을 잡고 총통을 제안하였다. 총통이 된 원새개는 북경을 수도로 종신황제가 되면서 합작은 깨졌다.

원새개가 죽고 북양군벌의 각파들이 베이징정부를 장악하였고 전국각지는 군벌들이 할거하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손문을 중심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남경이 수도로 정해졌다. 군벌이 있는 베이징정부를 타도하는 북벌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1920년부터 각 지방에서 공산당조직이 설립되었고 192171일 상해에서 각지역 대표들이 모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총서기에 진독수(천두슈), 그리고 이대교(리다자오), 장국도(장궈타오), 모택동, 이달(리다), 모순(마오둔), 등중하(덩중샤), 이한준(리한쥔), 유수송(위슈쑹) 등이 참여했다.

 

1차 국공합작(반봉건민족통일전선)

192361220일에 중국공산당 3(3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열렸다. 이 대회의 주요임무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혁명정세의 발전에 부응하기 위해 국공합작 통일전선의 구축을 가속화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첫째, 국민당을 좌익정당으로 개조하여야 한다. 둘째, 중국공산당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곳에서는 국민당을 확대시킨다. 셋째, 우수한 국민당원을 우리 당으로 흡수한다.을 결정했다.

전체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혁명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복잡한 논의과정을 거쳐야 했다.

19238, 중국공산당의 원조 아래 국민당은 장개석이장달장태뢰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소련에 파견하여 소련공산당과 소련 홍군의 조직을 관찰하게 하였다. 대표단은 육군해군학교를 참관하고 소련공산당 지도자와 코민테른 책임자를 만난 후 12월 중순에 귀국하였다. 같은 해 9, 소련 정부는 보로딘을 광주 주재 상설대표로 위임하여 파견하였다.

1025, 손문은 광주에서 중국국민당 개조 특별회의를 열고 국민당 개조의 필요성과 개조계획을 토론하여, 국민당 개조선언과 국민당 강령과 규약을 기초하였다. 회의에서 손문은 요중개담평산 등 9명을 임시중앙집행위원으로, 왕정위이대교 등 5명을 임시중앙집행위원 후보로 파견하여 국민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보로딘을 고문으로 초빙하여 국민당 개조작업에 착수하였다. 19241월에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1)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11월 국민당은 중국국민당 개조선언을 발표하였다.

공산당은 19231124일과 25, 상해에서 31중전회(중국공산당 제3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국민당 조직이 있는 곳에서는 공산당과 사회주의청년단원이 함께 가입하고, 국민당조직이 없는 곳에서는 조직건설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에 가입한 당원과 단원에게는 모든 정치적 언론행위에서 본당의 지휘를 받아야 하며, 국민당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1924120일부터 30일까지, 손문의 주관 아래 중국국민당 1대가 광주에서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 165명 가운데 절반은 손문이 지명하였으며, 절반은 각 성에서 추천선발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을 통과시켰는데, 이 선언에서는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재해석하고 친소연공부조농공의 3대정책을 확정하여 구삼민주의를 신삼민주의로 발전시켰다. 또한 대회에서는 이대교담평산(탄핑산)우수덕모택동임백거(린보취)구추백(취주바이) 10명의 공산당원을 위원과 후보위원으로 하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대다수의 공산당원과 사회주의청년단원은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조직발전과 노동자농민혁명지식인의 국민당 입당을 원조하였다. 개조를 거친 후의 국민당은 부르주아 성격의 정당에서 노동자농민쁘띠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의 민주혁명연맹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혁명통일전선이 정식으로 구축된 것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손문은 혁명군을 조직하여 중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원조와 지지 아래 19245월 광주 황포 장주도에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개교하여 이후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손문은 군교총리를 겸임하면서 장개석을 군교교장으로, 요중개(랴오중카이)를 군교당대표로, 이제심(리지선)을 부교장으로 왕정위(왕징웨이)를 정치부교관으로 임명하였다. 주은래(저우언라이)운대영(예젠잉)초초녀(샤오춘브)웅웅섭영진(네룽전) 등의 공산당원은 군교의 정치부교수부에서 지도와 교수직을 맡았다.

3국제당인 코민테른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많은 기여를 한것이 사실이지만 해악도 많이 있었다. 모든나라의 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그시기 국제당운동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였다. 특히 중국공산당운동에 가장 많은 해악을 끼쳤다. 이것은 대장정기간 준의회의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중국은 모택동중심으로 혁명이 진행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중국 계급관계 분석은 처음부터 우경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었다. 중국혁명을 부르주아혁명단계로 파악하고 국민당의 부르주아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민당 강화를 결정한 것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3112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관계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켜 공산당원 전체가 개인 명의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각 민주계급의 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부르주아국민당의 혁명성과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중국 노동계급의 역량과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결점을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중국 계급관계에 대한 우경적 견해는 이후 코민테른이 중국 민주혁명 통일전선문제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연합만을 중시하고 그에 대한 투쟁을 중시하지 않으며, 민주혁명의 지도권을 스스로 부르주아와 국민당에게 넘겨주게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후에도 좌경과 우경을 번갈아 가며 해악을 끼쳤다. 대장정기간 준의회의에서 코민테른의 결정과 그의 지도를 받는 세력이 정리되고 모택동중심으로 지도력을 구축할때까지 계속되었다.

국공합작은 실제로 군벌 타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듬해(25) 손문이 병사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문의 뒤를 이어 국민당의 주석이 된 장개석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국공합작 이후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확산되는 것에 위기감과 민심을 공산당에 빼앗기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주, 자본가, 제국주의 열강들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공산당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1차 국공내전

일제에게 국토의 일부를 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공산당과 노농홍군을 박멸하자는것이 장개석의 속셈이였다. 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여 국내의 정국부터 평정하고 일본과 싸우자는 것이 국민당의 노선이였다.

19274월 장개석이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며 제1차 국공합작이 끝났다. 국민당 군대는 난징과 상하이에서 노동자와 공산당원들을 무차별 학살하며 공산당원 10명 중 8명을 죽였다. 공산당은 192781일 새벽 2시를 기해 하융(허룽)과 주은래등이 난창을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국민당군의 역습을 맞아 불과 5일 만에 도시를 내주고 정강산으로 후퇴하여 소비에트를 만들게 된다. 봉기가 벌어진 81일은 국민당군대와 공산당군대가 최초로 맞서 싸운 날로 후에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로 삼아 기념하게 된다.

192787, 난창 봉기의 실패 이후 우한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긴급회의에서 총서기 진독수가 실각하고 구추백, 이립삼(리리싼)이 총서기에 추대되어 추수봉기, 창사봉기등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으나 좌경적으로 진행한 결과 국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하고 실패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국민당을 적극지원했다. 이후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지향하고 지하활동과 지방 소비에트 건설에 주력해 나갔다.

모택동은 중국에 혁명이 일어난다면 러시아와 달리 농민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가 농민인 봉건 사회 중국에서 혁명의 주요 세력은 농민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도시가 아닌 농촌에 혁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 이론은 당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농민은 예부터 내려온 봉건적 계급인데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을 하자는 것은 맑스 레닌사상과 인연이 없다는 것이 대다수 지도부의 생각이였다.

모택동과 주덕(주더)은 정강산에서 시작하여 강서성 전체를 아우르는 강서소비에트를 세우고 장개석 정부에 대항했다. 193111월 강서성 서금(루이진)에 수도를 정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설립을 선포했다. 이후 홍군의 지도자들은 곳곳에 소비에트를 만들었는데 호남성, 복건성, 안휘성등에 천만명이상의 해방구를 만들었다. 강서소비에트는 국민당과 군벌이 지배하는 중국 대륙에 떠 있는 붉은 섬이었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일종의 독립국이었다. 국민당과 군벌의 폭정에 민중들이 소비에트로 몰려들었다. 공산당은 이들을 홍군(紅軍, 붉은 군대)에 받아들이며 착실히 세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1933531일 국민당정부는 일본 관동군(關東軍)과 탕구정전협정을 맺는다. 중국은 일본의 만리장성이북의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고 홍군 토벌에 힘을 집중하였다.

장제스는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군하는 것을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토치카 진지를 건설하면서 야금야금 전진하면서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하게 하고 소금을 비롯한 필수 물자의 유통을 차단하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공산당은 일방적 열세에도 여러 차례 국민당군을 격파했다.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으로 많은 성과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소련에서 유학한 박고(보구)와 오토브라운(이덕)등은 정면대결을 주장하며 모택동노선은 폐기되었고 전면전을 진행하며 홍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포와 비행기로 무장한 정규군인 국민당군과 소총밖에 없는 홍군이 벌판에서 싸우니 결과는 보나마나 정해져 있었다. 흙과 나무로된 홍군 요새는 국민당군의 포화에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 버렸다.

더이상 버틸 수가 없던 홍군은 193410월 강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연안까지 이동하는 대장정을 벌였고, 공산당은 중국 서북 내륙에 새로운 연안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대장정 도중인 19351월 귀주성 준의에서 공산당 정치국회의가 진행되었다. 박고와 오토브라운중심의 볼세비키그룹이 소련식 교조주의 노선(노동중심의 전면전)에 대한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모택동의 노선 농민의 지원을 바탕으로한 유격전으로 전환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중국공산당사에 준의회의는 아주 중요한 회의로 모택동주석이 지도자로서 선출되는 회의였다.

준의회의 후 중국노동홍군이 성공적으로 북상항일의 전략방침을 실행하였다. 193581,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 대표단은 중국소비에트 중앙정부와 중국공산당 중앙 명의로 항일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함(81선언)을 발표하여 전국 인민에게 단결, 내전정지 항일구국, 항일연군의 조직을 호소하였다. 1113, 중국공산당 중앙은 일본제국주의가 화북을 병탄하고 장개석이 화북을 팔아넘긴 데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18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와 중국노농홍군 혁명군사위원회는 항일구국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 인민에게 단결과 항일민족통일전선 건립 주장을 제출하였다.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사업은 파시스트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의해 심각히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코민테른은 극좌적 하층통일전선전술을 교정하여 광범한 반파쇼 통일전선전술(상층통일전선)을 결정하였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