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구아는 농업이 주산업이고 커피와 면화 수출이 경제의 대부분이였다.
1926년 부통령 후안 바우시스타 사카사의 대통령 승계를 지지하는 산디노는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1927년 미 해병이 개입하자 수백 명의 부하와 함께 니카라과 북부의 산속으로 피신했으며, 그뒤 미군과 니카라과 국민방위대와 싸우며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널리 동조세력을 얻었다. 1933년 1월 미 해병대가 철수하고 사카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평화회담을 위해 국민방위대장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와 만나자는 제의를 받고 나갔다가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소모사는 1936년 국가 방위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었던 사카사를 몰아내고, 1937년 1월 1일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40여년 소모사가문의 독재가 계속되었다.
1956년 9월 21일 리고베르토 로페즈 페레즈는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소모사를 암살하지만, 장남인 루이스 소모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기 때문에 독재 정권은 루이스 소모사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물러날 때까지 20년 더 지속되었다.
암살과 쿠바혁명 이후 많은 무장조직이 만들어졌다. 무장투쟁은 계속해서 니카라과 국토를 피로 물들였지만 전 민중을 포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혁명적 조직과 지도부의 부재를 뚜렷이 나타내는 것이다. 산디노의 사상을 계승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하 전선)은 카를로스 폰세카를 중심으로 1961년 7월에 건설되었다. 이 당시 소모사도당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끈 것은 부르조아지였다. 전선의 건설은 소모사도당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부르조아지를 넘어 민중적 대안을 가졌다는 것이다.
산디노 사상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오직 노동자와 농민만이 제국주의와 그 지역적 정치 대리인들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할 수 있다. 또한 니카라과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조건 속에서 무장투쟁은 사회의 혁명적 변환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산디노는 "자유는 꽃이 아니라 총탄으로 쟁취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장투쟁은 1963년 코코강과 보케이의 게릴라투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이 혁명세력에 의해 준비된 최초의 무장행동이였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다. 1963년부터 1966년간 전선은 도시의 곳곳에서, 학생들의 한가운데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농촌조합에서 꾸준히 대중과의 접촉을 다져 왔다. 이러한 대중작업은 시인민위원회 또는 잘 알려진 혁명학생전선(FER)과 같은 전선의 중간조직들뿐만 아니라 야당과의 일시적인 동맹을 통해서도 수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발전전략인 이른바 진보동맹은 쿠바혁명에 대한 케네디의 정치적 대응으로 니카라과에서 소모사독재를 비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르네 시크의 위장적인 시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선거의 틀 내에서 부르조아민주주의가 부활했다. 이는 무장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전선은 투쟁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게릴라적 성격을 넘어선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게릴라전쟁이 한 번 끝나고 나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곤 했던 이전의 게릴라조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부르조아 반대파는 평화적 시위를 했으나 소모사정권은 1967년 1월 22일 민중을 대학살을 시작했다. 그것은 곧 반소모사투쟁을 지도하는 사회세력으로서 부르조아지가 갖고 있던 주도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소모사독재의 최후의 일각까지 평화적 투쟁의 필요성만을 이야기한 가톨릭에 대해 민중은 신뢰하지 않았다.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점차 강력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게릴라투쟁의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군부독재를 타도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팡카상과 필라 그랑데전투는 산디니스타전선이 니카라과민중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였다.
도시에 전술적 전투단위를 건설했다. 게릴라부대에 대한 공급노선을 확보하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도시나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리하여 산디니스타전선은 전국의 도시들, 특히 레옹, 마나구아, 마사야, 마타갈파, 치난데가 등지에 속속 침투하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전선이 광범위한 대중작업을 수행하여 구속된 많은 동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전선은 소모사 부대와의 전투를 신중하게 회피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역량을 축적하며, 또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군사전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이 원할 때는 싸우지 않고 전선이 적절하다고 간주할 때만 싸운다는 방식이었다.
1974년 12월 27일 ‘조용한 역량축적’의 시기는 끝났다. 국방부 각료인 에두아르도 콘트레라스가 이끄는 부대원 15명은 농업부장관의 집에서 파티중인 정부각료를 인질로 잡았다. 인질교환의 대가로 다니엘 오르테가를 비롯한 정치범 14명을 석방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을 통해 공식성명서를 낭독하고 2백만달러의 몸값까지 받으며 정치범들과 함께 쿠바로 망명했다. 이 투쟁을 통해 소모사 군부독재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써 전위는 역량축적단계를 넘어섰다.
소모사도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1975년부터 민중투쟁은 나날이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적의 억압으로 인해 전선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 수 없고 전선의 지도자 카를로스 폰세카가 게릴라전투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방위군은 다음날 폰세카를 처형했다. 콘트레라스도 폰세카가 쓰러진 바로 다음날 죽었다.
반동세력과 독재는 폰세카의 죽음을 하나의 승리로 해석했다. 산디노가 죽었을 때 니카라과는 이제 영원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카를로스 폰세카가 죽자 또 다시 이제 산디니스타전선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를로스는 죽었지만 결코 죽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을 소모사정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혁명에 참여하는 민중이 있는 한 카를로스는 죽지 않았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크게 세 부류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농민을 혁명의 주된 사회적 토대로 보고 농촌을 기반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힘을 축적하고자 한 집단(GPP, Guerra Popular Prolongada)이며, 둘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적인 노선에 따라 도시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했던 집단(TP, Tendencia Proletaria)이고, 셋째는 사업가, 교회, 학생, 중간 계급, 청년 실업자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 집단들과 동맹을 맺어 좀 더 급속하게 봉기를 일으키는 전략을 추구했던 집단(Tercerista)이다.
각기 다른 경험들을 종합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통일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향한 첫걸음은 민중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도시에서는 정치범을 위한 단식파업이 계속되었고 외국자본의 탐욕성과 함께 경제의 헐값 수출이 증가됨으로써 노동갈등은 한층 첨예화되었다.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항의운동도 계속 되었다. 서부 농민들의 가중한 토지 점유에 대한 대응으로 토날라, 시마라, 산호세 등지에서는 토지 몰수가 일어났다. 산디니스타의 투사들은 문맹퇴치운동, 생활조건 향상계획, 청년 및 문화운동을 광범위하게 수행했다.
소모사독재와 그 일당들의 성장은 대다수 부르조아지의 이익을 침해하였다. 소모사는 나라의 부를 부르조아지에게 골고루 분배하려 하지 않았다. 소수의 소모사가족과 그 일당들의 이익에 충실했다. 소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세금면제, 은행대출과 신용의 악용, 심지어 밀수까지. 이것들은 소모사도당과 부르조아지 간에 갈등을 빚었다.
소모사도당은 1978년 1월 10일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를 살해했다. 차모로는 초기 민족부르조아지의 지도자였고 수년간의 언론활동을 통해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대중을 거리로 뛰쳐 나오게 만들었다. 시위 속에서 대중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과 공개적으로 일치감을 나타냈고, 민중은 산디니스타전선이야말로 소모사독재에 대항하는 유일한 조직임을 알게되었다.
1978년 2월 전선의 무장활동(그라나다와 리바스, 산카를로스, 누에바 세고비아)과 10일동안 전국을 마비시킨 파업은 민중투쟁의 열기를 지속시겼다. 대중의 투쟁 의지는 갈수록 배가되었다.
산디니스타 지휘관인 리고베르토 로페즈 페레즈 부대가 1978년 8월 22일 내셔널 궁(의회)을 점령한 사건이 었다. 이 작전은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장군-소모사도당에게 죽음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소모사의 조카등 천여명이 인질로 잡혔고 몸값 50만달러와 59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파나마로 망명했다. 내셔널 궁의 점령은 민중뿐만 아니라 국제여론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78년 9월의 사건들로 이어졌다. 에스텔리, 마사야, 레옹, 치난데가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으며, 마나구아 교외에서도 민중봉기가 있었다. 이러한 투쟁들을 통해 민중은 국방수비대에 대한 공포감이 없어졌다. 9월투쟁이 독재를 타도하지는 못했으나 전략적인 승리였다. 그로 인해 전선이 강화되었고 민중들속에 각인되고 전사들도 확충되었다.
전선은 무기를 획득했으며, 보다 중요하게는 단호함과 신념을 획득했다. 고양되는 투쟁은 혁명조직이 지도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와 반동세력은 두려움으로 이를 관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위험에 처하자 독재자를 제거하고 소모사 없는 소모사파를 만들려는 소위 '중재'계획을 고안해 냈다. 그러나 거만한 소모사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중재'란 부패한 소모사당, 살인을 일삼는 국방군, 부르조아 반대파의 정당, 그리고 사적 자본 등의 이해를 뒷거래를 통해 조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모사에 반대하는 모든 분산된 억압․ 착취세력을 한데 끌어모아, 민중혁명운동을 진행하던 산디니스타전선을 고립시키고 파괴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재공작은 전선의 주동적인 조치에 의해 즉 전국의 모든 혁명적 정당․조직들을 전선의 지도하에 통일민중운동(MPU)이라는 정치적 동맹으로 조직함으로써, 그리고 이 MPU와 광범위한 반제국주의 및 반독재 정당․조직들과 동맹시켜 민족애국전선(FPN)을 결성함으로써 분쇄되었다. 중재계획은 전선 주위에 모여 철저히 무장투쟁을 지속하는 전 민족의 통일과 맞부딪치는 것이었다. 모든 동요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투쟁하려는 전선의 의지에 의해 중립화되었다. 봉기계획은 민중의 투쟁경험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무장 부대의 군사행동과 민중봉기나 총파업이 밀접히 결합되어 진행되었다. 마지막 봉기는 1979년 5월 전선이 요청한 총파업은 대중의 봉기와 결합되어 적시적소에 진행되었다다.
1979년 6월4일 전선은 총파업을 소집했다. 6월 16일, 코스타리카에서 임시 니카라과 정부가 5명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정권의 구성원은 다니엘 오르테가(전선), 모세하산(전선), 세르히오 라미레스 (전선), 알폰소 로벨로(사업가),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의 미망인)이다. 그 달 말까지 수도를 제외하고 니카라과의 대부분은 전선의 통제하에 있었다.
7월 9일 망명 임시 정부는 효과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조직하고, 정치적 다원주의와 보편적 참정권을 장려하며, 이념적 차별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한 정부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7월 17일 소모사는 사임하고 프란시스코 우르쿠요부통령에게 권좌를 물려주고 마이애미로 망명했다. 프란시스코 우르쿠요는 소모사의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려고 했으나 이틀 후 7월 19일, 전선의 군대는 마나과에 입성하여 혁명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전쟁으로 30,000~50,000 명이 사망하고 150,000명의 니카라과인이 망명했다. 5인정권은 다음날 마나과에 입국해 권력을 잡으며 정치적 다원주의, 혼합 경제 체제, 비동맹 외교 정책을 위해 일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1979년 7월 19일의 승리는 소모사군부독재에 오랜 기간 항거해 왔던 민중의 투쟁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은 카를로스 폰세카의 지도하에 건설된 전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7월 19일의 승리는 혁명적 통일의 정신 속에서 개인적 권력을 찾기를 포기하고,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7월 19일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커다란 위험이 아직 니카라과 앞길에 놓여 있다. 강력한 제국주의자들은 역사과정을 후퇴시킬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전선을 야수같이 물어뜯고 있다.
그러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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