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란혁명

이월인생 2022. 4. 10. 13:26

이란혁명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제국주의 영국과 독일은 석유자원이 있는 이란을 지배하려는 침략적 야망밑에 치열한 쟁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페르시아(이란)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칸(레자 샤 팔라비)이 혼란한 정세를 이용하여 19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1925년 왕위에 오르면서 팔라비 왕조가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군의 통과를 거부하는 한편 국내 독일인을 추방하는 것도 거절하며 히틀러정권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의 교전이 시작되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이라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영친독으로 선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 면한 송유시설과 중동지역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또한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고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불안해진 영국은 이란과 국경을 맡대고 있던 소련과 함께 이란에 최후통첩을 날리고 이란에 주둔했다. 영국은 팔레비를 왕위에서 내쫓고(남아공에 망명함) 194112월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이란민중들의 반제반황제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급속히 앙양되었다. 이런 가운데 실시된 1951년의 선거에서 민족부르조아정당연합체인 민족전선이 승리하여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왕 팔레비는 헌법에 따라 민족전선지도자였던 모사디크를 정부수반으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사디크정부는 민중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영제국주의자들의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19521월에는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등 반제적이며 진보적인 시책을 실시하였다. 서방국가들로부터 봉쇄를 당하자 친소련정책을 펴게 되었다.

모사디크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당황한 영제국주의자들은 팔레비를 부추겨 19588월에 모사디크를 총리직에서 축출할 목적으로 군사정변을 조작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팔레비왕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란을 틀어쥐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미제국주의자들은 바로 이 혼란된 틈을 이용하여 노골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미제국주의는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아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미중앙정보국요원들을 이란에 들여보내 친미 근왕파장군들을 모아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모사디크정부를 전복하였다. 그리고 망명한 팔레비를 데려다 왕위에 복귀시키고 그로 하여금 친미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하도록 조종하였다.

팔레비는 미제국주의의 사촉밑에 종래의 헌법을 폐지하고 모든 국가권력을 자기가 틀어쥐고 행사하는 친미군사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팔레비는 우선 미중앙정보국의 조종밑에 파쑈통치의 중추적 폭력기구인 비밀경찰 사바크57년 창설하고 군대, 경찰 등 폭압 역량과 수단들을 대대적으로 증강하여 전국도처에 폭압망을 거미줄처럼 늘여놓았다. 이리하여 이란에는 전대미문의 가혹한 파쑈통치가 실시되게 되었다.

팔레비는 13천여명의 친위병과 54천명의 비밀경찰, 20만명의 특무, 13만명의 정복경찰, 6만명의 헌병, 1만명의 감찰원, 43만명의 군대 등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폭압수단을 가지고 민중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게다가 이란에는 무려 43천명에 달하는 미군사고문과 기술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미중앙정보국 요원도 2000명을 넘었다. 게다가 미국은 페르시아만 연안에 강대한 미해군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팔레비는 또한 미, 영 제국주의자들과 새로운 석유협정을 맺고 이 나라의 모든 석유이권을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석유는 사실상 미제의 독점적 소유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근대화의 미명아래 실시된 기만적인 토지개혁은 이란농촌의 계급적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팔레비는 토지개혁을 통하여 지주들에게 땅값을 지불해줌으로써 지주들을 신흥자본가로 만든 반면에 농민들에게는 더욱더 무거운 부담만을 들씌웠다. 토지개혁과정에 가장 큰 지주였던 모스크의 토지를 몰수해서 분배했기 때문에 이슬람교의 반발을 사게되었다.

미국과 협정으로 미국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봉괴되었고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와 슬럼가를 형성하였다.

근대화가 추진된 결과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전통적인 바사루경제였다.

팔레비는 근대화추진에 장애로 되는 바사루경제를 와해시켜 없애버릴 목적밑에 과중한 세금부담과 무분별한 체포투옥 그리고 도시개혁이라는 구실로 시장을 마구 철거시키는 등 바사루상인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리하여 전통적으로 이란민중들의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란민족경제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바사루경제권내의 수많은 상인들속에서는 반제반황제감정이 급격히 높아졌다.

서구화를 모방한 근대화정책은 이란사회의 고유한 회교전통을 파괴함으로써 인구의 80%에 달하는 회교시하파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더욱이 팔레비자신이 회교시하파를 검은 반동이라고 모독하면서 그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강화한 것은 회교시아파세력들의 분노를 한층 격화시켰다.

팔레비의 유례없는 부정부패행위와 무자비한 파쑈폭압은 이란민중들속에서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과 대립을 첨예화시켰으며 이것이 바로 반제반황제민중봉기의 직접적 배경의 하나로 되었다.

 

반제 반항제민중운동

이란의 사회계급관계는 미제침략세력과 황족, 반동관료배, 군부상층, 매판자본가, 지주계급을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중소상공업자, 민족자본가, 학생, 지식인, 중하층군인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세력으로 대립되어 있었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주도하에 1963년 대규모 반제정 폭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호메이니는 이라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팔라비 2세는 스스로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친 서방 외교를 추진했다. 친 서방 정책으로 이란은 친미 국가였고 미국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에 판매한 적이 없는 최첨단 F-14 전투기를 이란 공군에 판매하고, 키드급 구축함과 F-16, F/A-18이 이란에 판매가 확정되었던 상태일 정도로 이란을 최혜국으로 대우하였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경제력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나 석유수출로 얻은 이득이 소수의 특권층과 부유층들에게 쏠리고 이란의 산업부문은 갑자기 높아진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모자라서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했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타 걸프왕국들도 소수계층에게 석유수출로 얻은 이익을 독점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서민들도 어느정도 부유하게 먹고살 정도는 되었는데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에 비해 인구가 몇배 이상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다 한들 그 수준은 타 걸프만 국가들에게 훨씬 못미쳤다.

팔레비는 민중들의 반제반황제투쟁이 앙양되자 이에 질겁하여 일부정치범의 석방을 비롯하여 군사재판의 개정, 형식상 고문의 중지 등 일련의 기만적인 완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억압당하고 있던 반제반황제세력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투쟁단체들을 조직했으며 광범위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775월에 민족전선위원장이었던 산자이를 중심으로 자유인권옹호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학생연맹이 개선된 데 이어 많은 군중조직들이 출현하였다.

이란민중당은 당기관지를 비롯한 출판물들을 발간하여 대중속에 공개적으로 보급하면서 대중정치사업을 활발히 벌여나갔다.

전국회교시아파지도자들은 회교의 성도 콤시에서 19779월에 집회를 가지고 헌법의 실시, 비밀경찰의 해체, 국가부흥당의 해산, 호메이니의 귀국승인 등 12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에 고무된 청년학생들과 회교도들, 바사루상인들과 지식인들은 반제반황제투쟁을 도처에서 힘있게 벌이기 시작하였다.

197711월에 청년학생들과 회교도, 바사루상인들은 타브리즈에서 헌법의 실시, 비밀경찰들의 해산, 자유와 교권의 회복 등을 요구하면서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벌이었다.

이리하여 대중적인 반제반황제민중운동의 발단을 열어놓았다.

 

민중운동발전의 제1단계(1978119789)

19786월에 테헤란대학생들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투쟁이 보다 고조되었다.

대학생들의 폭동에 질겁한 팔레비는 테헤란종합대학을 비롯하여 전국의 대학들을 페쇄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학생들은 투쟁무대를 거리와 지방으로 옮기고 더욱 적극적이며 결사적인 투쟁에로 넘어갔다.

결국 1978년 초부터 발생하던 반왕정 시위는 1978819일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방화사건(420명사망), 98일 검은 금요일 사태(라마단 마지막 축제가 시위로 변함)로 돌이킬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미셀 푸코는 사망자만 15,000여 명이라고 주장했다. 당국은 시위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란 정부는 사망자를 88명이라고 발표해 불신만 키웠다. 둘째, 무차별 발포는 한 가닥 남아 있던 대화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던 온건파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정권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떠난 것이다.

팔라비 2세는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사정권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한편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조치를 약속했다.

 

민중운동발전의 제2단계(19781119791)

노동계급이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7811월부터 노동계급이 총파업을 일으키고 민중운동에 합세함으로써 팔레비정권의 경제적 지반을 완전히 마비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 기업소와 지역단위로 파업위원회, 노동자위원회를 내오고 중앙에 시위파업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의 각 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행동통일을 보장하였다. 이리하여 국가의 기본경제적 지반이 완전마비상태에 들어갔다.

노동계급과 함께 국가공무원들과 재정금융부문의 종업원들도 파업을 일으키고 민중운동에 합세하자 군대를 동원시켜 탄압하는 한편, 그들에게 임금과 주택수당금을 대폭인상하는 것으로 회유기만하려고 하였다.

석유공업부문노동자들은 팔레비정권을 타도하자, 양키는 제 집으로 돌아가라등의 구호를 들고 투쟁기세를 더욱 높였으며 이에 모든 공장, 기업소 노동자들이 호응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결과 경제의 마비상태는 더욱 심화되고 신문과 방송, 언론 기관이 폐쇄되었다. 팔레비의 통치체제와 기능이 완전마비상태에 빠졌다.

팔레비의 마지막 지탱점인 군대가 분열와해되고 병사들과 중하층장교들이 민중운동에 합세한 것이었다. 197811월에 들어서면서 군대내 애국적 병사들과 중하층장교들이 민중운동에 합세하였다.

팔레비는 197811월중순에 쿠테타를 일으키고 군총참모장을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을 조작한 후 군인들을 항쟁진압에로 내몰았다. 그러나 항쟁마당에서 피흘리는 부모형제들과 친척친우들, 이슬람형제들을 직접 목격한 중하층장교들과 병사들은 오히려 반팔레비감정이 폭발하여 민중운동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시위자들은 빨간 카네이션꽃을 들고 달려가 병사들의 보총에 꽂아주면서 회교형제들에게 총을 쏘지 말고 총을 쥐고 도망치자!, 시위대열에 합세하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19781210일과 11일 회교의 순교제를 기념하는 시위와 폭동에는 전국적으로 2500만명(테헤란에서만 300)이상 참가하였다.

2단계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또한 반황제반미구호를 전면에 들고 공격의 화살을 미제와 그 주구 팔레비의 파쑈통치체제를 뒤집어엎는데 집중시킨 것이었다.

항쟁자들의 직접적인 공격대상은 미제의 조종밑에 움직이는 경찰서, 비밀경찰지부, 국가부흥당, 국가공공기관, 감옥, 외국기관들이었다.

항쟁자들은 도처에서 경찰서와 감옥들을 습격하고 반동들을 처단하였으며 수많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다.

미국정부는 대통령직속으로 이란정세를 연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내오고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의 전문가 60명으로 테헤란현지그룹을 구성하였으며 구라파주둔 미군부사령관 휴이저에게 특수임무를 주어 테헤란에 파견하였다. 또한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 침략무력을 집중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에프-15전투기를 증파하는 등 노골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민중운동을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다. 이 모든 책동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진출하는 폭동군중의 혁명적 기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197916일 서방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이 과달루프 합의로 이란 사태 불개입과 팔라비 2세의 퇴진을 종용하여 사실상 팔라비 왕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당시 민족전선부위원장이었던 바크티아르를 내세워 민간정부를 조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써도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종국적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형편에서 황제 팔레비는 더는 국내에 배겨있을 곳조차 없게되어 1979116일에 암치료를 명분으로 탈출망명해버렸다. 이리하여 이란에서는 세습적인 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팔레비가 망명하자 민중운동은 투쟁의 예봉을 친미민간정부인 바크티아르정권타도와 미제를 반대하는 데로 집중하였다.

 

민중운동발전의 제3단계(19791월말2)

이란민중운동의 제3단계에서는 전민중적 무장봉기로 팔레비의 친위부대잔당세력을 소멸하고 바크티아르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민중운동의 최후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란회교시아파의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것은 민중운동발전의 결정적 단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다.

197021일 호메이니는 오랜기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파리로부터 귀국하였다. 호메이니가 귀국하는 날 테헤란의 인구 450만가운데서 400만명이상이 비행장과 연도에 나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호메이니는 귀국연설과 기자회견을 통하여 전체 이란민중들에게 팔레비의 군주제를 종국적으로 끝장내기 위하여 바크티아르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회교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결정적 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하였다.

호메이니는 귀국 후 즉시 민중운동지도부로서 중앙에 최고혁명평의회중앙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방들에는 혁명위원회들을 내왔으며 25일에는 민족전선지도자 바자르간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혁명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이란에는 2중정권이 존재하게 되었다.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테헤란에서는 매일 400만명이상의 시민들이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중요한 군기지들에서 수천명의 장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거리에 달려나와 시위투쟁에 합류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지방의 여러 군기지들에서도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고 시위에 합세하였다.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를 수용하지 않았던 바크티야르 정권과, 왕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위대 및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29일 밤, 호메이니 지지를 표명한 군 내부의 반정부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시위대는 주변병영을 습격하여 무장하고 반정부군과 함께 전투를 벌여 211일에 오전 사령관등을 체포하기에 이러렇다. 총리와 친위대 대장들이 체포되어 213일 공식적으로 바크티야르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완전히 이슬람 혁명 위원회가 이란을 장악하고 이들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 혁명은 종료된다.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팔라비 2세와 그 측근은 망명 직후에는 이집트로 갔는데, 거기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해 나가야 했다. 그 뒤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등을 전전했다. 팔라비 2세는 이후 암 치료를 명목으로 파라황후 등과 미국으로 갔다. 미국이 그 입국을 인정한 것에 반발하여 1979114일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에 의해 점거됨과 동시에 약 70여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금지와 이란의 예금동결과 자산동결, 미국투자금에 대한 국유화 조치로 응수하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 만과 인도양에서 미 해군의 무력 시위가 전개되었다.

미국은 198047일에 공식적으로 이란과 단교했으며 미국 내 이란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미국은 육///해안경비대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항공기 사고로 미군 수송기 승무원 8명의 목숨만 앗아가는 결과만 얻고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알제리의 중재 하에 미국이 동결된 팔라비 왕조 당시의 재미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하고, 이란이 1981120일 사건발생 444일 만에 억류된 인질 전원을 석방, 미국으로 귀환함으로 막을 내렸다.

팔라비전국왕은 1979125일 사실상 미국에서 쫓겨난 후 파나마로 갔으며, 1980727일에 다시 이집트의 사다트 정부가 망명을 받아주기로 해서 카이로로 망명하여 19803월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카이로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