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경제 현실
칠레 경제에서 구리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은데 대부분의 구리 광산들은 다국적 기업(미국이 80%를 차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70년 당시 칠레의 1인당 국민소득은 954달러로 이미 중진국 수준의 국가였다. 1960년 기준으로는 일본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고, 1970년 기준으로도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는 중진국이었지만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아 부의 대다수를 소수의 부유층이 점유하고 있고, 농토의 대부분도 독점하고 있었으며 중산층의 비율도 그리 많지 않았으며 인구의 대다수는 경제수준에 걸맞지 않게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빈곤층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칠레의 정치 현실
193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 창당되었고 아옌데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8년에 중도파와 좌파정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집권하여 개혁적인 정책을 실시했고 아옌데는 인민전선정부에서 후생장관 역임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통치는 교육이다'란 구호를 내세워 교육제도 개선 확충을 밀어붙였고, 대다수의 어린이가 의무 초등교육을 받았다.
아옌데는 1952년과 1958년 그리고 1964년까지 세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중도파가 따로 떨어져나고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 그리고 보수진영의 격렬한 방해공작으로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아옌데는 1952년 대선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한 ‘인민전선’의 이름으로 나섰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 공산당 등이 모여 결성한 ‘인민행동전선’의 대통령 후보였다.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은 더이상 진보진영이 분열해서는 대선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 칠레 공산당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려 했으나 네루다는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사회당과의 연합을 주장하면서 사회당과 공산당은 연합하여 인민연합을 결성하고 대선후보로 아옌데를 내세우게 되었다.
세계최초 선거로 사회주의 정권을 만든 나라 칠레
치열했던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보수진영 측의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을 2%차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1위로 당선했다. 그러나 아옌데나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이나 과반득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의회가 상위 1, 2위 후보 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되었고 의회가 아옌데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확산을 걱정하던 미국은 반미 성격이 강한 아옌데의 당선에 당혹해 하면서 칠레 내정을 흔들려 했다. 그리하여 군부의 정치불간섭 주의를 고수하던 르네 슈나이더 칠레군 총사령관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르네 슈나이더는 납치는 면했지만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3일 만에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옌데는 "그 총에는 내가 맞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안타까워 했다.
아옌데 정권은 보수진영, 미국의 압박 속에서도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1973년 총선에서 대통령 불신임을 여유있게 막아낼 의석을 확보하고 의석을 늘리는데 성공했다(상원 50석 중 20석, 하원 150석 중 62석). 기독교민주당을 비롯한 우파세력들은 개헌선 확보를 목표로 잡았는데 득표율 57%를 차지했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충격을 받고 내분에 휩싸였다. 미국과 보수세력은 선거결과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면서 선거결과 발표를 몇일을 끌었지만 실패했다. 아옌데의 지지율을 급격히 하락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방해공작과 정책은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그게 바로 군부세력을 동원한 쿠데타다. 미국에 힘입은 군부가 이에 호응해 1973년 6월 22일 1차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군부의 중립을 강조하는 카를로스 프라츠 육군참모총장 겸 내무부 장관에게 사전에 간파당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아옌데는 최후의 정치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의했다. 그러자 보수파는 국민투표를 받아들이는 대신 육군참모총장을 친미 극우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로 교체할 것을 제의했고, 아옌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되었다.
라디오방송에서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계속 나왔는데 당시 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쿠테타군의 암호였고 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으로 쿠테타가 시작되어 대통령궁이 함락되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빈부격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탄광, 구리광산들과 대형은행들을 국유화했고, 영양 부족으로 유아사망률이 심했던 칠레의 상황을 고려해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는 정책도 추진했다. 다국적 기업과 미국 부유층의 과도한 대토지 소유를 규제하고자 사유지의 4분의1 내지 5분의1을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추진했다. 국회에서 우파세력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서도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런 사회주의 개혁의 성과로 칠레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을 8% 이상까지 치솟게 했다.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5% 이하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하게 되었다.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 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보수 언론과 기독민주당 등 야권 후보에 대한 미국의 재정 지원에도 굴하지 않고 이뤄낸 전례 없는 성과였다. 칠레 정치에서 집권당이 임기 중 지지율이 상승한 것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옌데는 당선된 직후 개헌을 제안했다. 공무원과 정치인에 대한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하기로 했고, 노동자 조직과 시민운동 진영에도 정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칠레 민중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주권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일련의 사회개혁 프로그램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 전국민 생활임금제, 사회보장제도 확대, 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있었다. 대규모 신규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 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차별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의 공교육제도가 입안됐고, 성인 문맹을 뿌리 뽑기 위한 문자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아옌데의 초기 성과는 미국의 고립과 경제제제 그리고 보수우익의 고립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집권 2년차가 되자, 지속되는 경제 고립으로 인하여 칠레 에스쿠도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각종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로 다국적 기업들의 반발과 의도적인 계략 및 공작으로 인해서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칠레 자본가 계층과 보수 야당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다국적 기업들 역시 반발하여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적 문제는 당연히 극심한 경제적 고립 때문이었다.
기독민주당 국민당등 보수파의 반격
생필품의 공급장악
공산품의 매점매석이 확대 암시장의 성장과 인플레 발생
화물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물류운송 차질
-> 식량물가위원회(ccpo)권한강화와 3천여명을 전국각지로 파견
2. 의회의 반격
식량물가위원회 담당장관을 비롯하여 석달동안 행정관 2명과 장관 7명을 해임시킴. 10일에 한명꼴로 고위공직자를 해임시킴
인민연합이 제출한 모든 법안을 부결시킴.
3. 반정부 시위
국민전선‘조국과 자유’ 파시스트 단체를 설립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
학생들의 시위
4. 자본가의 공세
운수부분 자본가들이 미국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사보타지를 벌엄.
5. 국영기업노동자들의 파업
구리광산의 파업(다른노동자들보다 임금이 20% 많은 귀족노동자들이였음.)
미국의 아엔데 정권 압살
- 케네디정부는 ‘진보를 위한 연대’를 60년대 만들어 남미정권에 대한 지원 친미보수정권을 수립하는 나라에 대해 지원. 칠레는 62년부터 69년까지 10억달러 지원
미국 국방부는 아옌데정부 2년 반동안 칠레 군부에 4천5백만달러를 지원함.
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의 반미정책과 다국적 기업 국유화 정책에 반대해 칠레 경제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1970년 아옌데가 당선되었을 때,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만~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닉슨정부와 CIA였다. 이런 행위에는 당시 칠레에 진출해 있던 미국계 초국적 기업도 자금을 보탰고, 거짓 선동이 '적색 공포'를 불렀다. 심지어 눈을 가린 죄수들이 총살당하는 장면이나 소련의 탱크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진주하는 모습 등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전파됐다. 조작된 거짓 선동이 아옌데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회를 극단적인 분열 상태로 몰아가며 금융시장을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목적에는 성공적이었다.
미국의 칠레 경제 고사 작전은 실로 치밀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였는데 칠레의 구리 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은 비축한 구리를 대량으로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 또한 칠레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했는데 계좌 동결로 대외차관을 막았으며 생필품과 의료품의 수출을 통제했다. 미국의 이러한 수출 통제정책으로 살바도르 아옌데의 핵심 공약이었던 분유 무상지급이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미국은 각 분유회사를 협박하여 칠레에 분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 미국은 칠레의 최대 신문사인 엘 메르쿠리오를 매수해 아옌데 정권에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을 대대적으로 쏟아내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칠레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조성되면서 생필품은 동나고 물가는 치솟았다. 그 결과 칠레의 경제는 아옌데가 당선된지 2년 만에 물가가 5배 이상 상승하면서 경제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국민적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간 물류수송을 담당했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했다. 그 결과 1972년 10월 미국이 계획했던 바와 같이 칠레 운수업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
아옌데 정권의 경제 정책이 워낙 조급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격렬해졌으며, 국유화된 기업들의 경영권을 원래부터 그 기업의 관리 사원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낙하산 인사로 채워넣었기 때문에 국유기업들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투자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사실, 칠레의 구리 광산들은 이 시기에 국유화가 되었어도 경영진들의 관리가 워낙 엉망이어서 증산이 아니라 감산 일변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성 구리 주문조차 제대로 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옌데가 당선되었을 때부터 그를 몰락시키고자 했던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이는 1975년 12월 18일 미 상원에 보고된 ‘1963년 – 1973년 칠레에서 벌인 첩보활동’으로 알려졌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아옌데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을 고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동포 여러분,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은 비통함이 아니라 실망이며, 그들이 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 도덕적 형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나는 노동자들에게 ‘나는 결코 사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지금 저는 인민들의 충정을 제 목숨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존엄한 의식 위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무력을 장악했으니 우리를 짓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범죄 행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그동안 보내주신 변치 않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정의를 갈구하는 여러분의 의지를 옮기는 통역 구실에 불과한 제게 보내주신 무한한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헌법과 법률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설을 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주십시오. 반동적인 무리들이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와 결탁해, 헌정 질서를 존중해 온 군의 전통을 깰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쉬나이데르 장군과 아라야 사령관은 칠레군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희생됐습니다. 저들은 지금 집 안에 숨어 자기들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군부와 권력을 찬탈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국의 겸허한 여성 동지들께 특별한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인민연합 정부를 믿어주신 여성 농민들과, 누구보다 힘써 일하신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인민연합의 보육 정책을 적극 이해해 주신 어머니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땅의 모든 애국적 전문 직업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터져나온 온갖 선동, 자본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특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계급 집단에 맞서 올곧게 투쟁해 왔습니다. 노래와 흥겨움, 열정으로 투쟁을 지원했던 청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칠레의 모든 남성에게도 안타까운 인사를 전합니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서는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이 연설은 아옌데의 아내와 세 딸, 통역 겸 비서인 미레야 '파이타' 콘트레라스 등 40명 남짓한 이들이 지켜봤다. 당연히 이 연설에 감동받은 이들 대다수가 눈물을 흘렸고, 아옌데의 측근들과 아내 세 딸, 동지들이 그를 끌어안았다. 연설 이후 아옌데는 자신의 아내랑 딸들을 포함하여 총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과 정부 각 부처 각료를 비롯한 동지들을 대통령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향해 돌격해 오는 반란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심지어 탱크에 맞서 휴대형 대전차포를 발사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교전 끝에 대통령궁 방어 작전에 동참했던 아우구스토 올리바레스가 부상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자, 휴전 협상에 나서는 척 하면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잠근 채 예전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로 받은 AK-47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 향년 65세.
◆ 참고 자료 : 칠레 전투(Battle of Chile)
1978년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이다. 국내에선 1998년 제3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한글자막을 씌여서 상영. 현재 한글자막본을 유튜브에 있음. 다 합치면 4시간을 훌쩍 넘긴다.
칠레전투 1부 부르주아지의 반란
칠레전투 2부 쿠데타
칠레전투 3부 민중의 힘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란혁명 (0) | 2022.04.10 |
---|---|
EC121 정찰기 격추사건 (0) | 2022.03.26 |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니카라과 혁명) (0) | 2022.03.14 |
꿈에 그리던 세한도를 보다 (0) | 2020.11.29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 (0) | 2020.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