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베트남등 인도차이나 3국은 19세기이래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2차세계대전기간 일본이 점령했다.
호치민등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일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베트민(일명 월맹)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베트민의 호찌민은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1차 민족해방전쟁
프랑스 제4공화국은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듯 하였으나, 곧바로 입장을 바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예비협정을 파기하며, 북쪽으로 프랑스군을 진격시켰다. 1946년 11월 23일에는 하이퐁 항구에 프랑스 해군이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을 가해 하루 동안 최소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했다.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보응우옌잡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호치민이 체포될 뻔 하기도 했다.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등 다른 프랑스령 해외 식민지에서의 독립 운동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아 또 죽일 거냐"는 국내 여론의 악화와 미국, 영국 등 여타 서방국가들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었다.
북베트남에서 프랑스의 국사적 패배
1949년 제2차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나자 북쪽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우세로 돌아서게 된다.
1951년 2월,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개시했다. 1954년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위신을 있는대로 깎아먹은 채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000명~3,000명 수준의 전사자를 내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0,0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베트민은 이보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결국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 측은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과 베트민의 북베트남으로 나눠졌으며, 8km DMZ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하였다.
남베트남
남베트남의 기득권층이 친불 성향이 강했기에 영향력이 유지되었으나, 이들 기득권층의 세력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급진 반공주의 연합조직 '혁명위원회'와 응오딘지엠의 정치적 동맹이 대두되면서 남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입지는 급격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양쪽 모두 반불성향이 아주 강했기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의 존재를 몹시 불편해했고, 각종 프로파간다로 프랑스군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결국 프랑스는 총 선거의 행정업무를 돕고 선거 실시를 감독해야 하는 휴전협정 이행조차 방기하고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철수해버렸다.
응오딘지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총선거에 반대했고, 남베트남의 여론 역시 이에 호응해서 20만에 달하는 대대적인 반 총선거 시위가 55년에 사이공에서 열렸다. 결국 총선거는 남베트남 대부분의 거센 반발로 무마되었고, 대신 베트남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분단이 장기화된다.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치안도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그때, 1960년 12월에는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12월 20일 남베트남사회의 모든 계층, 측 정당과 종파, 소수 민족을 포함한 인민계급이 모두 떠이닌성의 쩌우타인현에 위치한 떤럽(Tan Lap) 인민공사에 모여,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창설하였다. 이 조직은 조국이 재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남베트남을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적이고 중립적인 국가로 유지, 전환시킬 수 있는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1963년 1월2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와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압박 전투에서 미군을 물리칠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대승이였다. 압박 전투는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여 명에 불과한 전선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압박 전투에서 베트콩측이 18명의 전사자를 낸 것에 비해 남베트남군측은 86명(남베트남군 83명, 미국 군사 고문단 3명)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됐다.
1963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 제9차 총회는 당 간부 및 당원들에게 독립과 주권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힘쓰고, 북베트남의 사회주의혁명과 남베트남에서의 인민민주주의민족혁명을 위한 당의 정당한 노선 및 정책들을 확실히 견지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형제국들의 역사적인 체험을 베트남의 특수한 상황에 창조적인 방법으로 적용하도록 주지시켰다.
2차 민족해방전쟁
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화(도미노 이론)되는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가 떠난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인도차이나전쟁에 적극 개입하여 프랑스의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을 한 것이다.
직접적인 발단은 1964년 8월 2일 벌어진 통킹만 사건이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하여 월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하게 된다.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다.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했다.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가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를 격추했다. 폭격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초기에 양측은 보복전 수준의 국지적인 교전을 지속하며 전면전으로의 확전은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남베트남민족민족해방전선이 사이공에서 미 대사관을 폭탄 테러해서 상황은 순식간에 악화되었고, 본격적인 전쟁이 개시되었다.
1968년 1월 30일과 31일, 총공세(구정공세)를 수행하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무장군과 인민은 순식간에 67곳의 도시와 수많은 인접 농촌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후에를 비롯하여 새로이 해방된 많은 농촌지역에는 혁명정권이 수립되었다. 1968년 4월 20일, ≪베트남민족민주평화동맹군≫이 창설되었으며 미침략자들에 맞선 구국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이 확대되었다.
1969년 6월 6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베트남민족민주평화동맹군은 그 밖의 애국세력들과 함께 남베트남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 및 정부자문위원회를 만장일치로 구성하였다. 임시혁명정부의 수립은 남베트남의 혁명적 행정체계, 즉 진정한 의미의 민족․민주적인 행정체계를 완수하는 과정에서의 승리였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인민 혁명정부는 특히 농업정책과 같은 일련의 민주적 개혁을 해방구에서 수행하였다.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그들의 구호도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였다. 즉, 남베트남 농민의 대다수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주어졌다.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되는 한편 문화와 교육 그리고 보건 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났다. 해방구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던 일련의 민주적 개혁은 남베트남에서 서로 맹렬히 경쟁하는 두 개의 정권, 즉 민족민주주의정권과 신식민주의정권간에 첨예한 모순을 가져왔다. 남베트남에서의 인민혁명은 미국의 신식민주의로부터 잉태된 정권과는 반대로 생동감이 넘치는 새 정권과 함께 활발히 성장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3일, 당 중앙위는 전국의 당 간부와 당원 및 인민 무장군투사와 해외 거주 베트남인 및 국내 동포들에게 하나로 뭉쳐 민족의 슬픔을 혁명적 기상으로 전환시키고, 호 찌 민이 남기고 간 그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시켜 미침략자에 대항하는 애국항전과 사회주의혁명을 성공리에 완수하며, 평화적이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으로 번영하는 재통일된 베트남을 이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미국은 승산 없는 싸움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군대를 철수할 방안을 모색하면서 출구 전략(Exit Strategy)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결국 1973년 1월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은 파리 강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협정이 조인된 이후 북베트남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경제의 신속한 부흥과 개발 및 사회주의건설의 확대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민족민주혁명의 완수를 위한 지원을 약속하였다. 협정이 체결된 직후에 영국, 일본, 서독, 프랑스 등 많은 자본주의 나라들이 북베트남과 수교를 맺었다. 북베트남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미국과 남베트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1975년의 춘기 대공세와 인민봉기
북베트남 공산당은 일관된 전략을 구사했다. 3개 지역을 전략적 요충지로 보고 활동방식을 정리했는데 산악지역에서는 주로 무력투쟁을 수행하고, 농촌지역에서는 무력투쟁을 겸비한 정치 활동을 수행하며, 도심지에서는 주로 정치활동을 수행하도록 규정했다.
지방단위의 폭동을 일으키고 그것을 혁명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민중의 정치적 역량과 인민무장군의 군사적 역량 등 복합된 방법을 사용했다. 무력투쟁, 인민봉기는 정치․외교투쟁과 결합하고 고원지대와 농촌 그리고 도심지와 같은 3대 전략지역에서 군사작전과 정치활동, 적군에 대한 선무활동과 같은 세 가지 작전으로 적을 공격했다. 게릴라전을 정규전과 병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규군과 지역군 그리고 예비군 및 자위대 등의 3개 제대를 결합시켜 대․중․소규모 공격을 병행했다. 적을 소멸시키기 위해 토지지배권을 확보해 나갔다.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통일을 위해 춘기 대공세를 시작했다. 미국정부는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호치민루트를 통해 고원을 장악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무장군은 중부해안지대를 급속히 장악해 나갔다. 결국 4월 30일 사이공 대통령궁으로 탱크가 입성했다. 5월 3일까지 남베트남 전역의 장악을 완료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976년 북베트남과 통일을 선언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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