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중국의 통일전선 2

이월인생 2022. 6. 23. 20:12

2차 국공합작(항일민족통일전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차근차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당장 일본과 전쟁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지만, 장개석은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공산당 소탕에만 골몰했다. ‘내전을 중단하고 항일 투쟁에 나서라는 인민들의 요구에는 귀를 막고 있었다. 만주사변은 국민당 군벌이 일본과 전쟁으로 항일운동에 엄청난 도약을 기대했지만 정작 만주군벌 장학량(장쉐량)은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중국관내로 도망쳐버렸다.

한편 공산당은 효과적으로 전국적인 항일구국운동을 지도하고 혁명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해, 193512월 하순 섬서성 안정현 와요보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다. 장문천(장원텐)이 기초한 당면 정치정세와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가 규정한 당의 전략임무는 가장 광범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모든 항일역량을 단결조직하여 민족혁명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당면정세의 기본특징은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에서 일본이 독점하는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새로운 정세하에서 노동자농민도시쁘띠부르주아와 광대한 지식인은 굳건한 항일의 기본역량이다. 민족부르주아는 항일민족통일전선에 참여할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지주매판계급진영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당의 기본전술은 수천만 민중을 조직하고 거대한 혁명군을 차출하여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게 각 항의 구체정책을 조정하고 중화소비에트 노농공화국을 중화소비에트 인민공화국으로 개칭한다.

1936년 초, 중국공산당과 홍군 지도자는 동북군 장병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여 홍군은 우선 동북군과 연합하고 전국 인민 항일의 선봉이 되어 일본제국주의와 작전한다는 것을 명확히 표시하였다. 장학량의 요청으로 193649일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중앙을 대표하여 동북군 주둔지로 가서 비밀회담을 하였다. 장학량은 중국공산당의 내전정지 공동항일주장을 접수하고 홍군과 동북군의 상호 불침범상호대표파견 등의 사항에 합의하였다.

홍군토벌에 미온적인 서북군과 동북군을 지휘하기 위해 장개석은 시안으로 와서 장학량과 양호성(양후청)을 압박하였다. 장학량은 강력한 말에 의한 간청눈물에 의한 간청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마지막으로 무력에 의한 간청밖에 남지 않았다.

1212일 새벽, 장학량양호성은 서안성과 화청지에 부대를 배치하여 장개석과 요원 10여 명을 억류하고 전국에 전보를 보내 남경정부 개조내전정지민중애국운동 개방구국회의 즉시개최 등 8개 항목을 주장하였다. 시안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학량은 잠옷 바람으로 붙잡힌 장개석에게 공산당과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칠 것을 종용했다. 하극상이요, 쿠데타였지만 그만큼 항일 전선에 대한 여망이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시안 사건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9372월 시안에서 첫 국공회담이 열렸다. 국공회담은 9월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다섯 차례에 걸쳐 계속됐다. 중국국민당은 군의 통일, 정권의 통일, 적화(공산주의) 선전의 정지, 계급투쟁의 중지를 요구했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되어 명목상 국민당군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사이 19377월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7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과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국민당은 마지못해 일본과 싸우면서도 공산당과의 승부에 대비해 군대를 아꼈지만,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한 증오가 뼈에 사무친 농민들에게 총을 쥐어주며 용감히 싸웠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민심은 공산당으로 기울었다.

중국공산당 내에는 단결만 주장하고 투쟁을 언급하지 않는 우경 착오와 국공합작을 빨리 결렬시켜야 한다는 좌경 착오가 있었다. 19402, 당 중앙은 진보세력을 발전시키고 중간세력을 쟁취하고 보수반동세력을 고립시키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책략방침을 제출하였다. 3, 모택동은 연안의 고급간부회의 석상에서 당면한 항일통일전선중의 책략문제라는 보고를 하였다. 12, 중국공산당 중앙은정책을 논한다는 당 내 지시를 발표하여 이 책략방침을 체계적이며 전면적으로 천명하였다.

 

2차 국공내전(혁명적 민족통일전선)

2차 국공합작은 조바심이 난 장개석이 1940년 신사군사건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12월 장제스는 신사군을 안후이성과 장쑤성에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신사군 장교들이 반발하자 국민혁명군을 동원하여 포위 공격한 신사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양측의 긴장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서로를 믿지 않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4, 모택동은 연합정부론에서 몇 개의 민주주의적 제 계급이 동맹한 신민주주의국가의 건설을 주창했다. 이 단계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그 목표를 성취하여,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의 연합정부를 수립하는 목표로 옮겨가고 있었다.

19458월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충칭에서 장개석와 모택동이 만나 회담을 가졌고, 같은 해 10월 내전을 피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자,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에 나서 내전을 피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1월부터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합의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이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이 이에 항의하면서 결국 공동 정부 구성에 실패하였다.

19466월 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국민혁명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중국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3월에는 호종남(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혁명군(194712월 중화민국 국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194712월 모택동은 현재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국내의 계급관계 및 통일전선에 관해 언급했다. 여기서는 중소부르조아지를 가리켜 그들은 참된 민족부르조아지이다. 신민주주의의 국가권력이 미치는 지방에서는 이들 계급에 대해서 단호하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그 보호방침을 명백히 했다. 또한 19497인민민주독재론에서 민족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연약성을 언급하면서도 현 단계에서의 반제국주의 기치하의 국내통일전선 내에서 민족부르조아지는 대단히 큰 비중을 갖는다고 지적하면서 혁명적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물가상승과 실업으로 인한 경제 붕괴, 과도한 세금과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 가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의 분위기는 달랐다.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고,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도 없었다.

194811월 임표(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중화민국 국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역)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은 1949131일 베이징(평진전역)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장강(양쯔강)을 건너(도강전역) 4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을 해방하고, 527일 중국 대륙 최대 도시 상해까지 해방시켰다.

공산당은 19499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손문의 부인 송경령과 중국공산당, 국민당 혁명위원회, 국민당 민주촉진회, 중국 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공민주당, 중국인민구국회, 삼민주의동지연합회, 중국치공당, 구심삼학사,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무소속등 576명이 참여했다. 56명의 중앙인민정부위원중 27명은 민주당과 무소속인사들이였다. 1949101일 모택동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혁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14일에는 광주를 해방하고, 11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중경(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10일 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2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냈다.

1950년 하이난섬(海南島) 전투(1950.3.5.-4.30.)와 홍콩 근해의 완산 군도(萬山群島) 전투(1950.5.25 -6.27.)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잇따라 패퇴하고, 상하이 근해의 저우산 군도(舟山群島)(1950.5.16.)와 다천(大陳) (1955.2.11.)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양안(兩岸)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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